일어나자마자 조깅을 핑계로 밖에 나가 볼 심산에 해 뜨기 전부터 호텔 로비를 서성였다. 전에 평양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호텔주변은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상과 달리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망이 되어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때우고 아침일정을 시작하였다.
평양의 유적지들과 기독교
오전에는 평양에 있는 만경대 생가에서부터 김일성 주석 동상, 인민대학습당, 쑥섬사적지 등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특이한 것은 동상에 참배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배려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버스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은 차에 있으라고 이야기해 주었고, 헌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조금이나마 북측의 변화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인민대학습당(우리의 국립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비록 말을 걸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평양 시민들을 직접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인터넷은 안되지만 나름 컴퓨터실도 있었고,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안내원에게 “평일오전에 왜 이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으냐?”라고 물으니 북한에는 국가에서 무료로 교육시켜주기 때문에 일정기간 내에 일정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공부할 수 없다고 한다. 이곳에는 영어 등 집중해서 공부하는 과정이 있으며 대학재수생도 있다고 한다.
한편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인민대학습당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를 보게되었다. 감리교 북한교회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평양시 중구역 남문동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이 해방 전 북한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진 남산현감리교회 터 위에 세워진 것이 재확인되었다고 한다.(감리교 북한교회사 참조)
북한선교 전문가들은 그동안 평양의 옛 지도와 현재 지도를 대조해서 해방 전 남산현교회를 비롯해서 기홀(紀忽) 병원(홀 선교사 기념병원) 여성전용병원인 광혜여원,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서 다시 문을 연 광성학교, 그리고 선교사들의 주택이 있었던 평양부 수옥리(平壤府 水玉里)가 인민대학습당이 세워진 곳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는데 평양중앙방송은 지난 11월 11일(주일) 보도의 세 번째 뉴스인 “인민대학습당이 혁명사적교양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를 ”김일성이 주체 62년(1973년) 12월 13일 수도평양의 중심인 남산재에 몸소 인민대학습당의 터전을 잡아 주셨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평양을 자주 방문하고 있는 한 북한선교 전문가는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문을 빼고는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면모가 바뀌었는데 평양에서 안내를 담당하는 평양의 역사에 정통한 안내원들에게 장대현, 산정현, 남산현의 위치를 물어보면 장대현의 위치는 대개 지금의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는 곳이라고 일치된 대답을 하면서도 산정현과 남산현의 위치는 잘 모른다고 대답해서 안타까웠는데 북한의 대표적인 매체를 통해 남산현(남산재: ‘재’는 ‘峴’의 우리말)‘의 위치가 확인되어 기쁘다. 앞으로 평양을 방문하면 거의 빠짐없이 동평양에 있는 주체사상 탑을 안내 받게 되고 거기에서 인민대학습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인민대학습당을 바라보며 북한교회재건의 기도를 더욱 새롭게 해야 하겠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남산현감리교회는 1893년 홀 선교사가 평양 서문동에 큰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는데 노믈 선교사가 19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03년에 2,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교회당을 완공하여 평양을 비롯한 북한지역 선교의 기반이 되게 하였습니다.
<현재 인민대학습당의 모습>
그 자리에 세워진 인민대학습당은 연건평 10만 평방미터의 전통뱡식에 따른 10충 건물로 600개의 방과 3천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